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문단 편집) === '레드 테러' === >'''반혁명주의자들에게 죽음을!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에게 죽음을!''' >---- >1977년 2월 5일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아디스아바바]] 중심부에서 한 공개 연설 중. 그는 이 연설 후 '혁명이 적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피를 상징하는 붉은 잉크로 채워진 병 세 개를 바닥에 던져 깨트렸다. 1976년까지 에티오피아는 의회와 헌법을 폐지하고 야당을 금지하여 반정부 세력을 말살했으며 1977년 2월 3일에는 더르그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터퍼리 번티(ተፈሪ በንቲ, Tafari Benti, 1921–1977)를 쿠데타 모의 혐의를 적용해 차고로 압송한 후 소음기를 장착한 총으로 총살했다. 이후 멩기스투는 더르그의 의장 겸 최고 사령관이 되어 [[군사독재]] 정권을 만들었으며 [[소련]] 등의 지원을 받아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이후 멩기스투는 계속해서 억압적인 통치를 펼쳐나갔는데 이로 인해 에티오피아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생지옥이 되어 버렸다. 당시 군부가 자행한 학정과 악행들을 보면 멩기스투는 문자 그대로 '제2의 폴 포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잔인성과 국가에 미친 해악으로 따지면 '''그 [[이디 아민]]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는데도''' 이디 아민보다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다만 이는 멩기스투가 아민만큼 노골적인 자기자랑과 자극적인 외교를 벌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들 중 더한 인권탄압이 발생한 스탈린 치하 소련, 북한, 민주 캄푸치아 등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멩기스투가 묻힌 점도 있다.] 1976년 9월 23일에 시작되어 멩기스투가 국가원수가 된 1977년 2월 3일에 가속화된 후 1978년 3월 22일까지 1년 반 동안 자행된 [[공포정치]]인 '레드 테러(Red Terror)'[* [[암하라어]]로 커이 시브르(ቀይ ሽብር / ḳäy šəbbər).]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추산 50만에 달하는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고 그 중 대부분이 영장 없이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처형된 케이스였다. 드물게나마 재판을 받는 사람들마저 대부분이 군사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에 끌려간 사람들은 항소가 불가능했다. 이 '레드 테러'는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각 지역의 위원회들이 용의자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서로 만나면 각 구성원들은 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확인하기 위해 문서에 서명했고 그 문서의 사본은 상위 행정부와 당 기구로 보내졌다고 한다. 멩기스투는 국가원수로 집권한 뒤 반정부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야당인 에피오피아인민혁명당(EPRP)이 멩기스투의 주요 표적이 되었는데 이는 EPRP가 1976년 9월에 멩기스투를 [[암살]]하려 했으며 그의 지지 세력을 끊임없이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멩기스투의 EPRP 탄압이 어느 정도였냐면 단순히 EPRP의 책자를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살해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멩기스투는 금지된 단체에 가입한 학생들과 반정부 인사들이 해외에 살고 있으면 사람들을 보내 에티오피아로 강제로 끌고 간 후 구금하거나 가능하면 살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다른 정치 기구들은 물론 노동조합을 위시한 에티오피아의 모든 민간 단체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해산되었고 민간 단체의 지도자들은 줄줄이 체포되었으며 '레드 테러'에 대한 보고서를 전송한 영국인 기자도 '제국주의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또 멩기스투는 국민들의 출국도 엄격히 통제하여 반정부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과 구금자의 친척들의 에티오피아 탈출을 '국민과 나라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사형]]에 처했으며 당시 [[아디스아바바]]에는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심지어 당시 에티오피아인들은 국내의 다른 지역을 이동하는 것조차 제한을 받았다고 한다.[* 그 방법이 [[북한]]과 [[민주 캄푸치아]]처럼 '[[려행증|특별 허가]]'를 받아야 다른 지역을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게 하는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거리마다 검문소를 채워넣는 방법이었는지는 불명. 다만 본격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이 여행 제한 조치는 해제된 것으로 보인다.] 노동절을 앞둔 1977년 4월 29일 밤에는 반정부 시위 방지를 명목으로 더르그가 젊은이들의 체포를 명령했고 이에 진압군들은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반더르그 시위에 참여하거나 반더르그 팸플릿을 배포한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체포되어 수도 [[아디스아바바]] 외곽의 세 장소로 옮겨진 후 대량으로 처형당했으며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와 민병대가 아디스아바바 거리를 순회하며 반정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단 이틀 만에 더르그의 추산으로만 732명이 사망했고 앰네스티의 추산에 따르면 1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며 최대 2천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더르그는 이 학살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처음에는 이를 '제국주의 선전'이라고 일축했으며 이후에도 앰네스티를 '악의에 찬 반혁명적인 선전을 일삼는다'고 맹비난했다.] 이후 멩기스투 시기에 노동절 학살은 사실상 '전통'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아디스아바바의 시민들은 사살된 반정부 인사들이 공포감 조성을 위해 '반혁명 분자였다'처럼 처형당한 이유가 적힌 이름표와 같이 거리에 버려지거나 가로등 기둥에 매달리는 것을 아침마다 봐야만 했으며 에티오피아 정부군은 반정부 세력들을 교회에 감금한 뒤 불을 질러 살해하거나 산 채로 절벽 밑과 강에 떨어뜨려 죽였고 여자들은 군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다. 실제로 1977년 단 한 해 동안 아디스아바바에서만 3만 명의 정치범이 구금되었고 이 기간 동안 암살된 관료들은 더르그가 인정한 것만 200명에 달했다. 또 대부분의 구금과 처형은 아디스아바바에서 발생했으나 1978년에는 지방에서도 학살 사건이 여러 건 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7년 12월~1978년 1월에는 그런 정치적 테러가 절정에 달해 단 하룻밤만에 100명 이상이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군인들은 살해한 사람의 목을 잘라 시장에 경매에 내놓기까지 할 정도로 잔혹했다. 그리고 종교 활동에도 제약이 가해져 몇몇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종교 예배를 방해한 것은 물론이고 1978년 3월에는 한 성직자의 14살밖에 안 된 아들을 납치한 후 단 4시간도 안 되어 잔혹한 [[고문]]으로 죽게 했으며 1978년 12월 21일에는 에티오피아의 군대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잔혹한 학정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1977년 5월 17일에 [[세이브 더 칠드런]]은 '아디스아바바에서 8살 정도의 아이들을 포함한 어린이 1천명이 학살당했으며 그들은 대부분 11~13세 정도밖에 안 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거리에 유기되어 떠돌아다니는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었다'는 발표를 했다. 실제로 당시 군부는 '단순히 글을 알거나 20세 이하인 사람들은 잠재적이거나 실제 '반혁명' 분자일 것'이라고 여겼다고 하며 심지어 ''''8세에서 12세 사이의 어린이를 체포할 수 있다''''는 법률까지 제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유족들은 시체를 되찾기 위해 군인들에게 '가족을 살해하는 데 사용된 총알의 대가'라며 미화로 25~125달러(2023년 환율로는 124~621달러) 정도의 돈을 바쳐야 했으며[* 참고로 1977년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는 약 134달러로 추정되는데 이는 2023년 환율로는 약 665달러다.] 시체 더미에서 사살된 가족과 친구의 시체를 찾으려는 사람들과 사망자를 애도하는 사람들까지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다. 게다가 당시 [[고문기술자]]들은 멩기스투에게 헌납하기 위해 고문 장면을 수시로 녹화한 후 멩기스투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멩기스투 본인은 국영 방송국에게 공포감 조성을 위해 정적들이 참혹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전국에 송출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심지어 멩기스투는 동시기의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처럼 직접 정적 처형에 가담했는데 실제로 손수 정적을 끈으로 교살하거나 총살했으며 이에 대해 '모범을 보인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잔혹성 때문에 당시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멩기스투를 [[식인종]]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다만 그런 멩기스투도 극미량의 양심은 있었는지 민족학 박물관에 있던 종교적 전시품들은 전부 창고에 쳐박아 두긴 했어도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레드 테러' 기간 동안 황실 시절 관료들과 그들의 친척들은 구금되기는 했어도 후술할 고문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 멩기스투는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을 내세우면서도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활동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는데 이 때문에 멩기스투의 학정 속에 살던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이전보다 더 빈번히 교회를 찾아 오히려 교회 출석률이 역대 최고치로 증가할 정도였다.[* 참고로 공산 국가에서 교회 출석률이 증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하는데 실제로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는 대놓고 '무신론 국가'를 내세우며 종교를 탄압했고 [[북한]]과 [[민주 캄푸치아]], (공식적인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긴 했지만) [[마시아스 응게마]]의 [[적도 기니]] 역시 종교를 금지했다. 다만 이들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특히 폭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또 멩기스투는 1988년 5월에 12년 동안 에티오피아 정교회 총대주교를 역임한 아부나 타클라 하이마노트(Abuna Takla Haymanot, 1918–1988)[* 신도들에 대한 박해가 가중될 것을 두려워하여 멩기스투 정권에 직접 맞서지는 않았지만 "내 백성들아, 온 마음을 다해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에 동참하면서 강해지고 기도하라."고 설교했으며 에리트리아와 티그라이 지역에 대한 에티오피아군의 폭격에 대해 멩기스투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에 멩기스투는 "국정 간섭을 중단해라"며 화냈고 지속적인 단식과 고행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하이마노트는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더욱 엄격한 단식을 하다가 1988년 5월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가 죽자 정부 차원에서 국장을 지시한 것을 넘어 정부와 당의 고위층 인사 대부분을 참석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